최근에 이사를 했다. 인테리어를 새로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이라 인테리어에 대해 전반적으로 만족하고 있지만 방 한 곳의 벽지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집주인이 아이들 방으로 생각하고 선택한 벽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방은 한동안 창고처럼 쓰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둘 순 없는 법. 결국 이번 주말에 벽지에 페인트를 칠하기로 결심했다.
젯소나 바니쉬같은 처음 듣는 단어들을 보며 대강의 방법을 습득했고, 쿠팡의 로켓 배송 덕에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페인트와 도구들이 도착했다.
작업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고, 페인트를 바르는 작업 자체는 의외로 수월했다. 저렴한 페인트임에도 냄새도 거의 없고, 빨리 마르고, 수성이라 어디 묻어도 쉽게 지워졌다. 게다가 친환경보다 더 나아간 순환경이라고 한다. 바르다보니 예전에 생각하던 페인트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페인트 회사에서도 R&D를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실 페인트의 본질은 색깔이 아닌가? 과연 사용성, 냄새, 친환경 요소같은 걸 개선하게 되는 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연구 개발팀 개개인의 장인정신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품의 발전을 이런 선의에만 기댄다면 세상은 이렇게 발전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영향을 준 외부 요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러한 요인으로는 구매자의 선호, 시장 경쟁, 그리고 정부의 환경 규제 등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나씩 생각해보자.
1. 구매자의 선호
페인트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어떤 요소를 우선으로 할까?
우선, 구매자는 간단히 소매 구매자와 도매 구매자의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소매 구매자는 개인이나 소규모 인테리어 업자가 사서 직접 바르는 경우를 상정했고, 도매 구매자는 대규모 건설현장에서 사용하기 위해 구매하는 경우라고 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구분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직접 작업을 하느냐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구매 결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는, 가격, 발색, 친환경, 작업 편의성 정도가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작업 편의성이란 바르기 어렵지 않은지, 금방 말라서 작업 소요 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 냄새가 덜 나서 작업이 힘들지 않은지, 어딘가에 묻었을 때 쉽게 지울 수 있는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상정했다.
각 구매자 그룹은 어떤 요소를 최우선으로 생각할까.
Disclaimer: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소비자 설문 조사등을 하진 않았으니 앞으로의 내용은 그냥 내 추측에 의한 내용임을 명시한다.
소매 구매자의 선호 요소
소매 구매자의 경우, 직접 작업을 하고, 페인트 구매양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그 페인트를 바른 곳에 직접 들어가서 거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친환경과 작업 편의성의 우선순위가 높아질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페인트의 가격 자체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된다. 우선 페인트 자체가 생각보다 그다지 비싸지 않다. 페인트 만드는데 인건비가 많이 들진 않아서인 것 같다. 아무튼 한번 작업할 때 재료비로 엄청난 금액을 지출해야 되는 게 아니다보니, 저렴한 페인트를 사용하면서 부담해야 할 리스크보다 비싼 페인트를 쓰고 안정감을 얻는 게 이득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그렇다면 발색은 어떨까. 추측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소매 구매자의 경우 여러가지 페인트를 실제로 모두 비교해보고 구매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색 자체를 고려해서 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인테리어 업자가 있다면 비교적 많은 케이스를 비교할 순 있겠다. 그리고 사실 이 글의 주요 논의는 발색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두자.
정리하면, 소매 구매자는 작업 편의성과 친환경을 가격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페인트 업계에서 소매 구매자를 노린다면 작업 편의성과 친환경 측면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개발할 것이다.
간단히 찾아보니 노루페인트는 B2C 시장에도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한쪽 벽면에 직접 페인트를 도장해 볼 수 있도록 마련된 ‘팬톤페인트’ 체험존은 페인트 인테리어 초보자라도 쉽게 체험해 볼 수 있다.
실내에서 페인트를 사용해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페인트 냄새에 대한 편견을 확실하게 없애주기 때문이다.
노루페인트 관계자는 “집방의 인기로 페인팅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며 “페인트 체험과 컬러컨설팅을 통한 시공 상담 등에 대해 소비자의 니즈가 늘어나고 있어 이마트타운 일산점, 이마트 성수점, 신세계백화점 센텀점, 김해점에 이어 스타필드 하남에 매장을 오픈하게 됐다”고 밝혔다.
출처 : 노루페인트, B2C 시장 적극 공략, 2016-09-20
도매 구매자의 선호 요소
그렇다면 도매 구매자는 어떨까. 우선 직접 작업하지 않고, 대량 구매를 하게 된다. 그러나 건설사의 경우 입주 예정자의 입김이 무척 강하다. 따라서 작업 편의성은 덜 중요하고, 가격은 매우 중요하며, 친환경 측면은 고급 건물, 특히 거주지일수록 중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색 부분은 평가하기 어렵다. 가격과 발색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당연히 가격일 것 같고, 디자인을 신경 쓴 건물일 수록 발색이 중요할 것 같다. 이 부분은 소매와 마찬가지로 우선순위를 쉽게 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최소한 소매/도매 구매자 안에서 그룹을 하나 더 나눠야 하는데.. 일단은 마찬가지로 논외로 하자.
정리하면, 도매 구매자는 가격-친환경-작업 편의성의 순서로 각 요소를 고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과 친환경의 우선순위는, 가격은 모든 도매 구매자가 고려하겠지만 친환경은 고려하지 않는 구매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낮을 것 같다.
따라서 도매 구매자의 선호에 의한 친환경 및 작업 편의성 측면의 개선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페인트 기술 발전의 원동력은, 페인트 회사들이 소규모 구매자 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에 의한 것일 수 있겠다. 어쩌면 Sophisticated buyer 이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일지도.
2. 시장 경쟁
페인트 하면 노루페인트 밖에는 생각나지 않지만, 분명히 페인트 업계에도 경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사에서 소비자의 취향을 더 충족시킬 수 있는 개선된 제품을 내놓으면, 최소한 그 제품보다 뒤쳐지진 않아야 점유율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 자체가 성장하고 있다면, 점유율을 지키기만 해도 매출은 성장하니 큰 문제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 페인트 시장의 구조는 어떨까. 노루페인트의 2019년 사업보고서를 보았다.
국내도료시장은 성숙기에 진입한 상태로 시장전반의 성장 둔화와 업체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 도료산업의 주요 수요산업인 건설, 자동차, 선박, 전기/전자산업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어, 국내경기에 민감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다변화된 수요기반 및 제품구성, 고부가치 제품개발로 도료수요를 꾸준히 증가시켜 왔으며, 특히 해외수출증대 및 해외현지 시장 개척을 통한 시장확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지구온난화, 새집증후군 등 환경과 건강에 대한 문제 해결의식이 제기되면서 페인트 업계에도 고기능, 친환경 페인트에 대한 기술 요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료산업은 기존의 범용 페인트 기술을 넘어 고기능, 특수 기술과 증가되는 해외시장을 바탕으로 제 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국내도료업계는 200여개의 업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업체 수에서는 종업원 300인 이하의 중소기업 비중이 약 95%에 달하고 있으나, 종업원 300인 이상의 대기업은 6개사에 불과합니다. 시장 점유율 면에서는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를 겸비한 상위 5개사가 시장 점유율의 약 80%에 부합하는 과점체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높아지는 환경규제와 사회적 인식 변화로 인하여 친환경과 기능성 도료 등 품질을 요구하는 수요는 점차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상위 생산업체의 시장지배력이 제고되면서 과점업체의 점유율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상위 5개사가 80%를 점유하고 있고, 시장의 성장은 둔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점유율 상위 기업간의 경쟁이 점차 심해질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예상한바와 같이) 환경 규제와 사회적 인식 변화로 친환경&기능성 도료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하니, 해당 수요를 차지하기 위한 기술 경쟁도 심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경쟁에 의한 기술 발전도 맞다고 볼 수 있겠다.
3. 정부의 환경 규제
사실 기업들에게 친환경 측면의 개선을 요청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 개선이라는 것이 기존 방법이 환경에 안좋기 때문에 요청하는 것이고, 기존의 방법을 변경한다는 것은 곧 비용의 발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론 규제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앞서 나온것처럼 도료와 관련된 환경 규제는 강화되고 있다.
친환경 도료란?
환경친화형 도료는 기준설정 이전 제품보다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적게 함유된 도료만 공급·판매되도록 “도료에 대한 휘발성유기화합물 함유기준”을 정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도료의 제조․수입․판매자는 VOCs 함유기준에 적합한 환경친화형 도료만을 공급․판매하여야 하고, 이를 위반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용도분류별로는 건축용, 자동차보수용, 도로표지용, 공업용 도료로 나누어 VOCs 함유기준을 정하고 있습니다.
환경부에서는 도료업계의 기술개발 수준 및 준비기간 등을 고려하여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의 함유기준을 단계적으로(’07. 7, ’09. 7, ’10. 1, 15. 1)강화하였으며, 2013. 5. 24부터는 도료의 VOCs 함유기준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출처: 환경부 수도권 대기환경청, 환경친화형 도료 설명
“친환경 도료란?”이란 소제목과 내용이 약간 안맞는 것 같지만, 아무튼 정부에선 도료의 휘발성유기화합물 함량을 제한하는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간단히 찾아보니, 휘발성유기화합물은 페인트의 용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페인트가 마르는 게 곧 용제가 기화되는 것이다보니, 휘발성유기화합물이 대기중으로 방출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휘발성유기화합물은 오존을 만들어서 스모그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건강에도 안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규제를 하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페인트 냄새도 휘발성유기화합물 때문에 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규제의 강화는 친환경 측면의 개선을 이끌었고, 친환경성을 개선하다보니 냄새도 개선된 셈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규제의 특징이라면 (최소한 해당 국가의) 모든 기업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친환경 규제의 영향으로 가격이 오르더라도 경쟁 제품 역시 가격이 올게 되므로 경쟁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기업 규모나 기존 투자 여부에 의해 가격이 오르는 비율은 다를 수 있겠다.
정리하면 구매자의 선호, 시장 경쟁, 환경 규제 모두 페인트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마무리를 위해 여기서 교훈을 하나 이끌어내자면, 무언가를 발전시키려면 각 사회의 구성 요소들이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겠다. 개인은 자신의 선호를 표현하고 주변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시장을 통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기업은 스스로의 개선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업계 전체의 발전을 유도할 수 있고물론 이 과정에서 담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시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이를 요구함으로써 기업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제한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세상이 조금씩 발전하고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