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신 포도”라는 다큐멘터리는 무슨 와인이든 맛만 보면 척척 맞추는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가 위조 와인을 만들어 판매한 사건을 다룬다. 오래된 빈티지의 유명한 와인들을 거래하는 경매장에 처음 보는 젊은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거액을 지불하며 와인들을 사들이고 와인 모임에 나가 인지도를 쌓은 후 자신의 컬렉션을 경매에서 판매했는데 알고보니 가짜였다는 이야기.
여러 재밌는 점이 있었지만 그런 엄청나게 오래된 빈티지의 유명한 와인들이 거래되는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선 꽤나 흥미로웠다. 오래된 위스키들을 거래하는 시장은 있다고 들었지만, 와인은 관리 상태에 따라 변질되기 쉬운데 그걸 맛도 보지 않고 거금을 내고 산다는 게 신기했다. 이 고가 와인 시장은 금융 버블이 커지면서 성장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보너스를 40억원쯤 받은 사람들이 10억 정도는 아무렇게나 써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산다고. 중간중간 나오는 “와인 컬렉터”들은 매일 마셔도 못 마실 수준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던데 그 쯤 되면 그냥 사치품 수집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역시 사치품 시장은 금융 버블과 함께 성장하나보다.
그 사기꾼이 굳이 고가 와인을 사기 대상 시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그걸 추론해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미각이 뛰어나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 같다. 어쩌면 자기가 그냥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라서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그냥 비싼 와인의 맛이 궁금해서 사서 마셔보기 시작했는데 마시다보니 다른 와인을 섞으면 비슷할 것 같아서 시작했다거나. 그런 비슷한 뉘앙스의 장면도 있고.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것 처럼 밀봉된 음료(?)는 그걸 열어 보기 전에는 내용물을 검증할 수 없다. 그 얘기는 곧 물품의 품질과 별개로 판매자의 평판과 권위를 믿고 구매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다큐멘터리에선 병 겉에 드러나는 부분으로 가짜 여부를 판정하지만, 그런 판정 기준이 체계화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와인 시장을 노린 이유일지도 모른다. 다이아몬드는 수많은 보석 감정사들이 존재하고 보증서도 있으니 가짜를 판매하기 훨씬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많은 고가의 물품들은 진품임을 입증하기 위해 물품에 대해 보증서를 발급하고, 물품을 거래할 때 보증서를 같이 거래하게 된다(사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 같다). 물품만 있으면 안되고, 보증서를 같이 갖고 있어야 그 가치가 인정된다는 의미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 얘기는 물품만으로는 진품 여부를 검증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어쩌면 물품보다 보증서가 더 중요한 건 아닐까..?
그래서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보증서들을 블록체인에 올리겠다고 하나보다. 생각해보면, 사실 물품 뿐만 아니라 보증서도 위조할 수 있다. 어쩌면 더 쉬울지도? 최소한 블록체인에서 보증서를 발행하면 보증서의 위조는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보증서를 잃어버릴 가능성도 더 높아지겠지만.
그러나 우린 보증서의 진품 여부가 중요한게 아니라 물품의 진품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차라리 진품이 진품이라는 걸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더 필요하다. 보증서가 진짜라고 하더라도, 모조품을 만들어서 진짜 보증서와 함께 팔고, 진품은 집에 고이 보관해뒀다가 나중에 진품인걸 입증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유명한 미술품 같은 건 일이백년쯤 지나면 물품만으로도 진품임을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정리하면, 판매자의 명성과 권위에 기대는 방식이 가장 취약하고, 보증서 시스템이 그 다음이고, 진품이 진품임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게 가장 확실한 셈이다.
그럼 진품이 진품임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물리적인 방법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최소한 물리적으로 동일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정말 어려우니까. 사실 가짜 다이아몬드는 진짜 다이아몬드랑 물리적으로 동일하니 이 점에선 속이기 쉬울지도..
그렇다면 물리적인 검증 방법이라면 뭐가 있을까. (막 던져보자면) 제작자의 생체정보를 사용하거나, 방사성 동위원소 같은 걸 쓰거나, 아니면 해당 물품의 물리적으로 위조할 수 없는 어떤 정보값을 사용하거나.. 이런걸로 진품임을 입증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 입증 방법을 <불변의 블록체인>에 기록해두면 어떨까. 물론 그 블록체인이 없어지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지만. 볼드모트처럼 여기저기에 쪼개둬야 하나. 분명히 이것도 찾아보면 훌륭한 아이디어들이 나와서 이미 도입되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사실 개인적으론 그 사기꾼이 만든 가짜 와인들이 궁금하긴 하다. 엄청난 와인들을 마셔본 사람이고 미각도 뛰어난 사람인데, 나름 열심히 연구해서 만든 배합 비율일테니 제법 훌륭하지 않을까. 컬렉터들 중엔 자신이 그 사기꾼에게 산 와인이 가짜라는 걸 알고서도 차마 밖에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신고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돈이 많고 유명한 사람들일테니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솔직히 그걸 그냥 마신다고 얼마나 알아챌 수 있을까. 당장 동일 빈티지의 같은 와인을 옆에 두고 비교하며 마시기도 어려울 거고.
그 사기꾼은 감옥에서 복역 중이라는데 나와서 유튜브 하면 성공할거다. “1930년 빈티지 로마네 콩티는 이거랑 이걸 a:b로 섞으면 완전 똑같아요”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