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의 역설: 공부와 연구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거북이를 아킬레스보다 100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10m를 가고,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스가 10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1m를 나아간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거북이는 움직이므로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제논의 역설)

제논의 역설에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느리기 때문이 아니라,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이 아킬레스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직관과는 어긋나지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정말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일까? 최소한 나는 얼마 전까지 아킬레스와 같은 상황이었다.

크립토 업계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인다. 크립토 업계의 한 달은 1년과 같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술도 너무 자주 바뀌어서 n개월 전에 올라온 글이면 5n개월 전에 올라온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다른 IT분야의 기술 변화 속도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여러 사회/문화적 부분과도 얽혀 있다 보니 따라잡아야 하는 내용 자체도 많다. 2011년부터 크립토 업계를 지켜본 유니온 스퀘어 벤처스의 프레드 윌슨조차도 요즘은 업계 흐름을 따라잡기가 버겁다며 “소방호스로 물을 마시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내공이 엄청난 프레드 윌슨조차 힘들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변화를 따라잡기 힘든 이유에는 새롭게 쏟아지는 정보의 양이 많다는 점도 있지만, 그 정보가 정제되지 않았다는 점도 크다. 여러 미디어들의 역할은 차치하더라도, 연구자/개발자들이 쏟아내는 내용 역시 정제되지 않은 무작위적인 정보들이 마구 쏟아져나온다. 신생분야다 보니 새롭게 정의되는 용어도 많고, 몇 주 전에 낸 연구 내용을 전부 뒤집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연구 내용 자체도 피어 리뷰를 거치지 않고 그냥 블로그에 글 쓰듯이 올라오는 게 대부분이다 보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피어 리뷰가 트위터/레딧/포럼 등에서 토론을 통해 이뤄지는 셈이라서 결국 정제된 내용을 파악하려면 토론 내용을 모두 따라가야 하는데, 비영어권 출신으로서 영어로 된 글을 읽으며 파악하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나마 기술적인 내용이라면 수식과 코드 위주로 파악할 수도 있지만, 거버넌스 쪽으로 넘어가면 더더욱 힘들어진다. 게다가 아무리 오픈된 프로젝트라도 코어팀 내부에서 이뤄지는 논의는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으므로, 최신 연구 내용을 완벽히 따라가면서 그 연구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얘기처럼 쓰긴 했지만, 실은 내가 지난 몇 달간 느낀 점들이다. 최신 연구 내용을 따라가면서 조금이나마 기여를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 이야기 속의 아킬레스가 된 기분이었다. 수년간 이 분야에 있던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연구 성과를 기초도 없이 따라잡으려 하는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거북이가 아킬레스를 따라가는 것에 더 가까웠겠다. 그래도 어느 날은 많이 따라잡았다 싶은 날도 있었다. 그래도 다음날이 되면 저만치 앞서가 있더라.

한동안 그런 날들을 보내다가, 결국엔 따라잡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단순히 지쳐서 그만둔 건 아니었다. 결국엔 내 고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결과물은 그저 그 사람의 것일 뿐, 내 것이 되지 못한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을 목표로 두는 순간, 그 사람을 앞설 수 없고, 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지르지 못한 것은 아킬레스의 목표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서려면 거북이가 아닌 결승점을 목표로 달리면 된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이라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결승점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기존의 연구자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각자 자신이 필요한 기초 역량을 쌓고, 그 이후에는 기초에 기반해서 자신만의 연구를 하는 것. 공부를 넘어 연구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인데, 나는 그동안 쏟아져 나오는 정보에 매몰되어 공부에만 매달려 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어떤 것을 알고 싶은지를 고민하고, 필요한 내용을 공부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생각을 하나씩 써 보려고 한다. 이 글,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나눌 생각들이 나 스스로뿐만 아니라 필드 전체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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