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패러다임의 변화와 금융 버블

지난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크립토는 광기의 현장이었다. 사실 그 당시엔 잘 몰랐는데 지나고보니 이런게 버블이구나 싶더라. 난생 처음 버블을 겪고나니 버블이 왜 생기는지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프레드 윌슨이 오래전부터 카를로타 페레스(Carlota Perez) 교수의 이론으로 크립토 업계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을 발견했다. 버블을 다룬 많은 책이 금융 투기와 그 심리에만 주목하는 데 반해, 페레스의 이론은 그동안의 금융 버블을 기술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페레스의 여러 논문 중 2004년에 나온 “Finance and technical change: A long-term view“을 읽어보았고,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2002년에 발간된 책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이 그 내용을 가장 자세히 담고 있다고 하는데, 저자 본인이 2004년 논문이 책 내용을 압축한 버전이라고 하기에 이 논문을 읽는 것으로 갈음하였다.

페레스의 이론은 흔히 이 그래프 하나로 설명하곤 한다.

perez_framework페레스는 기술 혁명을 단순히 기술의 등장과 소멸로 볼 것이 아니라 기술이 끼치는 경제적 영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술로 인해 생기는 새로운 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경제 구조 전체에 영향을 끼치며 사회 전반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기술 혁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발생하게 되는데, 각각의 기술경제학적 패러다임은 약 반세기 동안 유지된다고 한다. 페레스는 그 이유로, 새로운 기술이 사회의 표준이 되려면 기존 패러다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특히 새롭게 등장하는 여러 기술 중에도 현재의 패러다임과 맞는(compatible) 기술들은 쉽게 보급이 되지만(예: 전기가 보급된 이후 가전제품의 보급은 쉽게 진행되었음), 기존 패러다임과 잘 맞지 않는 기술은 적합한 용도를 찾기 전까지 매우 한정적인 분야에만 사용되게 된다(예: 증기 기관을 운송용 동력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기 전까지 증기 기관은 광산에서 물을 빨아내는 데에만 사용되었음).

그러나 그렇게 변두리에서 한정적으로 사용되던 기술들은 기존 패러다임의 수익 창출 능력이 포화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이때 상대적으로 이동이 용이한 재무적 자본(financial capital) 중 벤처 캐피탈 같은 대담한 집단이 그동안 외면받고 있던 기술에 자본을 공급하게 되고, 새로운 자본을 얻게 된 기술은 점차 꽃을 피우게 된다. 그렇게 새로 등장한 기술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되는데,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낮은 리스크로 많은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핵심 기술 없이 흉내만 내며 비슷한 사업을 벌이게 된다. 결국 실제 가치 창출 능력과는 상관없는 장부상의 가치(주가)만 부풀어 나면서 버블이 형성되게 되고, 시간이 흘러 버블이 무너지면서 “도입 단계(installation period)”는 끝나게 된다.

그러나 페레스는 금융 버블을 통해 기술 혁명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기 위한 신뢰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버블로 인해 높아진 사회적 관심은 결국 규제 변화로 이어지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생산 자본(production capital)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심을 갖게 되며 실제적인 보급의 기틀이 갖춰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재무적 자본에서 생산 자본으로 경제의 중심이 옮겨가게 되고, 거대 기업들로 구성된 생산 자본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여러 방향으로 패러다임에 맞는 기술 혁신을 이룩하며, 점차 사회 전체가 해당 기술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전개 단계(deployment period)”라고 부르며, 점차 패러다임의 성장 가능성이 포화 되게 되면 전개 단계도 끝을 맺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또다른 기술 패러다임이 등장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 프레임워크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크립토는 새로운 패러다임인가”였다. 일단 페레스는 아직 IT기술 패러다임의 전개 단계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보는듯하다. 한편 프레드 윌슨은 지난 크립토 버블을 “도입 단계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크립토는 새로운 패러다임일 수도 있고, IT기술 패러다임의 일부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닷컴 버블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버블이 있었고, 기존 산업들로부터 극심한 반감을 샀으며, 규제 제도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점차 기존 업계에서 블록체인 기술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페레스의 프레임워크가 크립토의 상황과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우버를 위시한 공유경제 기업들이나 자율 주행 같은 여러 딥러닝 기반 기술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어쩌면 공유경제 스타트업들이나 딥러닝 스타트업들이 더 큰 버블인지도 모른다. 다만 크립토의 특성상 주식 상장 없이도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모을 수 있고, 기존의 시각으로 보기에 토큰은 내재가치가 없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버블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든 생각은 “정말 크립토 버블이 붕괴한 것일까”였다. 고점 대비 가격이 많이 내리긴 했지만 사실 기간으로 따지면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크립토 업계의 그동안의 타임라인들을 보면 페레스 프레임워크에서 제시된 시간에 비하면 많이 짧다. 투기 열기는 많이 식었지만,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은 아직 뜨거워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닷컴버블이 무너졌을 때는 이것보다 분위기가 훨씬 안 좋았던 것 같다.

사실 사회과학에서 제시되는 프레임워크는 사회 현상을 보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할 뿐이다. 페레스의 프레임워크 역시 크립토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 프레임워크로 현상을 바라보면서 여러 의문을 갖게 되고, 거기서부터 다양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될지는 지나 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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