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아웃의 병뚜껑은 화폐로 적절할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과 연이어 나오는 복잡한 뉴스들을 보며 왠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생각나서 였을까. 재택 근무를 하며 확보한 통근 시간 동안 폴아웃3를 플레이하고 있다. 원래 RPG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어서 어느새 본편의 엔딩까지 보았다.

폴아웃은 핵전쟁 이후 황폐화된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게임이다. 여기저기 방사성 물질들이 널려있고, 물은 방사능에 오염되어있으며 여러 가지 연유로 변이된 생물체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각자의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고, 자연스레 생겨난 공동체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거래를 할 때는 병뚜껑을 화폐로 사용한다 (안타깝게도 핵전쟁 때문에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진 않은 세계이다 보니 암호화폐가 쓰이긴 어려운 상황이다).

Fallout 3 Bottlecap Mine - YouTube
이런 병뚜껑을 주우면 돈이 1 늘어난다.

이 병뚜껑은 누카 콜라라는 음료의 병뚜껑으로, 누카 콜라는 누가 봐도 그렇듯 코카 콜라 같은 이미지의 회사다. 많은 사람들이 마시고 있고(그런 듯 하고), 자판기도 도처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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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누카 콜라 관련 상품을 수집하는 팬도 있다. 세상 어딘가에 코카 콜라 팬도 있을 법 하긴 하다.

그러면 여기선 왜 병뚜껑을 화폐로 쓰게 됐을까. 물론 나름의 설정이 있겠지만 (없을 수도 있지만) 설정이 궁금한 건 아니니까 화폐로 쓰게 된 연유에 대한 질문보다는, 병뚜껑이 화폐로 쓸만할까 라는 질문이 더 적절할 수 있겠다.

앞서 말했듯 누카 콜라는 거대 기업으로 보인다. 물론 게임상에 누카 콜라 공장이 존재하고, 사실 규모가 크진 않다. 근데 뭐 이 근처 지역만 커버하는 공장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렇다면 누카 콜라는 넓은 범위에 골고루 배포되어 있을 것이다. 코카 콜라 캔은 전 세계에 배송되고 있어서 오지에 물건을 배송하려면 콜라 캔 형태로 만들면 쉽다는 얘기도 있으니, 누카 콜라도 코카 콜라가 모티브라면 비슷한 규모를 갖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누카 콜라는 핵전쟁 때 망했는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병뚜껑은 전 세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을 테니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을 수 있고, 누군가 찍어낼 수도 없고 병뚜껑을 엄청나게 모아둔 사람도 없을 테니 인플레이션도 없고 갑작스런 유통량 변화도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괜찮은 화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면 여기서 화폐의 기본 용도 3가지를 살펴보자.

  1. unit of account: 가치 평가의 단위
  2. medium of exchange: 거래의 매개체
  3. store of value: 가치 저장 수단

음.. 왠지 화폐랑 관련된 논의라 이걸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별로 상관 없어 보인다. 이미 병뚜껑은 돈으로 쓰이고 있으니 이 기능을 다 만족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대신 이러한 기능을 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거래의 매개체로 쓰이려면 가지고 다니기 편해야 한다. 그래서 작고 가볍게 하기 위해 다들 동전의 형태로 만들거나, 우리나라 엽전처럼 가운데 구멍을 뚫어서 묶고 다닐 수 있게 하거나, 금본위제를 벗어난 이후엔 종이로 만들어서 가볍고 작게 만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병뚜껑은 생각보단 괜찮은 선택지이다. 작고, 가볍고, 어쨌든 금속이라 어느 정도의 내재가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금속이 드문 폴아웃 세계에선 여차하면 녹여서 다른 곳에 쓸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런 “내재가치”를 갖는 화폐의 경우 균일함이 중요한데, 공산품이니 균일함도 보장되어 있다.

물론 야프섬의 라이 같은 무겁고 큰 화폐도 있지만, 작은 사회에서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케이스이니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야프(Yap)섬의 라이(Rai)

한편 가치 평가의 단위로 동작하고, 가치 저장 수단으로 동작하려면 모두가 그 화폐의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금화같은 화폐 자체가 가치를 갖는 경우엔 이미 가치가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금본위제같이 “언제든 그 가치에 해당하는 금으로 바꿔준다”는 전제가 있을 때는 “금으로 바꿔주는 주체”가 존재하고 그 행위를 반드시 실행할 수 있음이 담보되어야 한다. 금본위제를 벗어난 지금은 그냥 정부의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의 역할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폴아웃 세계에서도 병뚜껑의 가치를 모두가 인정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일반적으로 어떤 화폐가 새로이 도입되려면 정부(와 같은 권력자)가 그 화폐를 이용한 지불을 강제하고 보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폴아웃 세계에는 그런 중앙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엔클레이브라는 자칭 정부는 존재하지만, 세계관 내에서는 하나의 세력일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지정하고 강제한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 만약 지정했다면 특정 기업이 만든(그리고 그 기업이 지금은 사라진) 병뚜껑을 화폐로 지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자기들이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화폐로 삼지.

그렇다면 이제는 게임 내 설정을 찾아볼 차례가 되겠다. Fallout wiki의 병뚜껑 항목에 따르면 폴아웃1에 등장하는 교역 도시의 상인들이 병뚜껑 한 개를 물 한 병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면서 그 가치를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폴아웃3에서는 그 배경은 등장하지 않는듯 하다. Fallout wiki의 화폐 항목엔 좀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 외에도 병뚜껑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전쟁으로 없어졌기 때문에 위조를 막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스토리의 주요 내용이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것이니 “깨끗한 음료”는 충분히 그 가치가 인정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병뚜껑은 이미 그걸 다 마신 뒤에 얻게 되는 셈인데 과연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다. 나무위키에선 폴아웃1에서 병뚜껑을 주면 물을 주는 식으로 거래가 진행되었고 병뚜껑이 물을 깨끗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 때문에 그랬다는데, 설득력이 있는 설정인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화폐의 가치라는 건 사용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그렇게 사용했다면 그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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